일상에서 누리는 예술을 꿈꾸며 차와 커피 리추얼을 소개하는 명솜귤 대표. 그가 전하는 한국적 미와 행법의 감각은 한옥 로만재에도 고스란히 스며 있다.

커피 행법을 시연 중인 로만 명솜귤 대표. 명솜귤 대표는 차와 커피 행법을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자 지난 4월, 90m² 규모의 작은 한옥 로만재를 오픈했다.
소란한 거리가 지척이지만, 이곳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목재 기둥과 기와지붕으로 둘러싸인 마당에는 세상에 오로지 나와 이 집만 존재하는 듯 고요함이 깃들어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발소리도, 말소리도 잦아들며 어느새 한옥의 리듬에 몸을 맞추는 자신을 발견한다. 명솜귤 대표의 한옥 로만재에서 마주하는 장면이다.

설계를 맡은 바이아키텍쳐 이병엽 소장은 창호와 벽면을 뽀얀 한지로 마감해 행법을 위한 차분한 배경을 만들었다.
문화 예술 콘텐츠 기획자이자 차행법 숙우회 사범인 명솜귤 대표는 차와 커피 행법을 통해 한국의 미와 명상을 경험하는 리추얼을 소개해왔다. 그의 언어는 차나 커피가 아니라 ‘행법’이다. 도구를 정렬하는 순간, 차를 내리는 순간, 정해진 방법을 하나하나 정성껏 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중심을 살피고 몸과 마음의 여유를 되찾는 것. 그는 일상 속 예술 행위와도 같은 이 행법을 더 많은 이에게 전하고자 로만재를 열었다. “어릴 때부터 예술을 가까이하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업으로 삼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의 자산 가치는 높아지는데, 정작 좋은 예술을 일상에 들여와 누리는 경험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차행법을 경험하면서 예술의 한순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의 일이 시작되었지요.”

실내 공간으로 바뀌어 있던 대청에 실과 마당 사이의 정주 영역이자 작은 외부 공간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유리문 대신 한지 문을 달아 빛과 그림자, 소리와 기척이 느슨하게 오간다.
버튼만 누르면 커피 한 잔이 완성되는 시대에 수많은 단계로 이루어진 행법을 익히고, 긴 시간을 들여 음미하는 일. 명솜귤 대표가 이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며 얻고자 하는 배움은 ‘삶의 중심을 찾는 것’이다. “수많은 행법이 있지만, 처음과 끝의 세팅은 모두 같아요. 그 위치만 제대로 공부해도 삶이 굉장히 정갈하게 변합니다. 꾸준히 하다 보면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정돈된 태도를 지키게 되고요.”

가운데 있던 현관을 옮기고 대청을 되살려 영역성을 되찾은 마당.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던 뽕나무는 정성껏 다듬고 키워 이제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잎을 드리운다. 덕분에 마당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벗들과 함께 마시는 행법인 청음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었다.
의복과 다구, 테이블 위에 두는 들꽃까지 한국 문화가 곳곳에 깃든 행법을 소개하는 장소로 한옥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자연과 긴밀히 연결되는 한옥은 몸의 오감을 깨우기에도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로만재는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에도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작은 집이지만 바닥 높낮이가 조금씩 달라 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공간감이 다채롭게 변했고, 여러 주인을 거치는 동안에도 처음의 구조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로만재의 탄생을 함께한 건축가이자 명솜귤 대표의 오랜 지인인 바이아키텍쳐 이병엽 소장 또한 3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한옥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모임채에 설치한 창 너머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1930년대에 지은 한옥으로 추정해요. 1백 년이 다 되어가지만, 골격이 탄탄하고 보존도 잘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하 주차장이 더해지고 실외 대청은 실내 공간으로 증축되어 있었죠. 그리고 2026년에 로만이라는 새로운 쓰임이 생긴 거예요. 저희가 고친 뒤에도 집의 역할은 계속 변화할 텐데, 그 긴 시간 속에 지금의 개입이 다음 이어달리기를 위한 작은 흔적으로 남기를 바라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태도를 담은 집
이병엽 소장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노부부가 살던 집을 수도원처럼 고요한 장소로 바꾸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당 가운데 있던 현관을 대문 옆으로 옮긴 것. ㄷ자형 한옥의 배치와 칸 구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동선을 바꿔 통로로만 쓰던 마당의 영역성을 되찾았다. 현관이 새 자리를 찾으면서 처음 마주하는 바깥방은 행법을 준비하는 방으로, 가운데 거실과 주방은 로만의 넓은 무대로, 안쪽 방은 보다 사적 교육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정해졌다.

문고리와 에어컨 커버 등 작은 요소에도 로만의 무드를 섬세하게 불어넣었다.
복도로 바뀌면서 사라진 대청을 되살린 것은 로만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마당이 제 역할을 하려면 정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마당의 영역성을 형성하고, 실내와 실외의 전이 공간이 되는 대청마루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석재 기단 위에 목구조가 올라서는 한옥의 언어를 반영해 기단을 따라 대청을 만들었지요.” ㄷ자형 한옥을 감싸는 대청은 서로 다른 기단 높이에 순응해 세 덩어리로 나뉜다. 필요하면 떼어 옮길 수 있도록 만든 데에는 이 집의 다음 이어달리기가 수월하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다정한 마음이 담겼다.

행법을 위한 기물을 한지 장에 정갈하게 두었다.
배치와 칸을 그대로 두었음에도 한옥이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니게 된 것은 한지 덕분이다. 이병엽 소장은 벽과 천장을 모두 뽀얀 빛을 머금은 한지로 마감하고, 창호 역시 창살까지 한지를 덧붙였다. “몇 차례 행법을 직접 경험해보면서 공간의 디자인 언어보다 행법에 쓰는 기물과 행위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한옥은 동선이 미로처럼 이어지고, 곳곳에 창이 많아 다소 산만할 수 있었기에 창살의 나무 테두리까지 한지로 마감했습니다. 벽과 창을 입체감 있는 연속된 면으로 감각하는 배경이 되고자 했어요.”

로만재 외관.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소란한 골목과 전혀 다른 고요함을 만날 수 있다.
콩댐 한지 장판을 깐 바닥은 로만재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콩댐은 불린 콩을 갈아 들기름에 섞어 자루에 담고 문지르며 배어 나오는 콩기름으로 바닥을 마감하는 전통 방식이다. 마루나 장판은 이틀이면 끝나지만, 콩댐은 꼬박 2주가 걸린다. 초배지 위에 종이를 한 장씩 덧대 붙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고, 콩기름을 먹인 뒤에도 다시 말리고 덧바르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한다. 공사를 마친 뒤에도 콩댐 바닥은 완성되지 않는다. 1년에 한 번씩 손봐야 하고, 맨발에 닿는 촉감과 은은한 향이 무척 좋지만 얼룩이나 물기가 스미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이 모든 수고조차 집을 위한 행법과도 같았다. 일곱 배가 넘는 시간을 오롯이 들여 완성한 하얗고 깨끗한 공간을 바라보며 명솜귤 대표는 아름다운 기물로 한옥을 더 채우려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주는 울림을 느끼고, 고요하게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입식 말차 행법 모우暮雨를 시연한 명솜귤 대표. 저녁 무렵 내리는 어스름비라는 의미를 지닌 모우는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기 직전, 하루가 가장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간을 담은 행법이다.
지난 4월 공사를 마친 뒤 두 계절을 한옥에서 보내며 명솜귤 대표는 자연이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자연이란 이토록 깊이 바라봐야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느꼈다. 한여름에도 집 안 깊숙이 편안하게 드는 바람,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들리는 빗소리, 나무와 종이 같은 원물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경험. 한옥에서의 시간은 익숙하다고 생각한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로만재에 들어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놓아요. 천천히 걷게 되고 조용히 명상을 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자세가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지나치게 걸음이 빠르지 않은지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행법의 시작이에요. 행법이 추구하는 것이자 제가 원하던 바인데, 완성된 한옥이 저절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더라고요. 저 역시 그 힘을 이어받아 한국적 멋을 누리는 경험을 잘 전해가고 싶습니다.”

입식 행법을 할 수 있는 가장 안쪽의 작은 배움채.
불교의 화엄 사상에는 ‘인드라망Indra’s Net’이라는 비유가 있다. 무수한 구슬이 그물의 매듭마다 놓여 서로를 끝없이 비춘다는 뜻이다. 이슬로 꿴 휘장을 의미하는 로만露幔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함께 행법을 하며 서로의 모습에서 배움을 얻는다. 로만재는 그렇게 일상에서 무뎌진 감각을 되찾고, 다른 이와 삶의 균형을 나누는 집이 되어가고 있다.
바이아키텍쳐는 2016년 이병엽 소장이 설립한 서울 기반의 건축 집단이다. 건축설계와 운영, 시노그래피를 넘나들며 삶과 건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공간이 완성된 이후의 쓰임과 시간까지 건축의 실천으로 다룬다. 주요 작업으로 단독주택 ‘Villa’ 시리즈와 ‘취향관’, ‘힘의집’, ‘물의집’ 등이 있다. byarchitecture.kr